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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 '독수리소년단' 광복 후 76년 만에 '항일 기념비'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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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1.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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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시독립사업회, 독립운동유가족, 시, 도의원, 이천시관계자 등 여러명이 제막식에 참여했다..jpg

▲ 지난 18일, 장호원 진암공원에서 열린 76년 만에 항일 '독수리소년단' 기념비 제막식에서 이천시독립사업회, 독립운동유가족, 시, 도의원, 이천시관계자 등이 참석한 가운데 제막식을 갖고 있다. / 사진=이천독립운동기념사업회 제공


- 지난 18일, 장호원 진암공원서 유족과 최원 80여 명 참석 -

- 장호원 초등생 14명으로 구성 '독수리소년단' ... "후손들에게 선양가치 높아" -

- "이 시대 친일 세력 아직도 존재 '이천시도 예외 아냐" .. ‘B미술관’ 청산 과제로 지목-


[이천=경기1뉴스] 한철전 기자= 이천독립운동기념사업회가 지난 18일 장호원 진암공원에서 독립운동가유족, 시·도의원, 회원 등 8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광복 후 76년 만에 항일 '독수리소년단' 기념비를 설립·제막식을 가졌다고 22일 밝혔다.


사업회에 따르면, 일제치하 36년 중 1939년, 이천 장호원제일심상소학교(현 장호원초등학교)에 다니는 14명의 어린 학생들이 항일 독립운동단체 ‘독수리소년단’을 결성했다. 이들은 어리지만 당시 독립운동의 진면목을 보였으며, 3년 뒤인 1942년 모두 투옥되고, 심한 고문 후유증으로 4명이 일찍 세상과 이별했다.

 

이천독립운동기념사업회(회장 최의광, 사업회)가 주최, 주관한 기념비제작과 설립에 각 단체와 더불어 뜻이 있는 개인들까지 작은 정성을 모아 함께 참여했다. 

 

이날 최의광 회장은 인사말을 통해 “이 기념비를 세우기까지 애써주고, 후원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어린 14명의 소년들은 목숨을 담보로 항일 독립운동의 최선봉에 섰는데, 이제야 기념비를 세우게 된 것에 매우 송구하며, 한편으론 다행스럽다”며, “이 시대에 아직도 친일세력들이 존재하며 이천지역도 예외가 아니다”고 말하고, 친일화가 A씨를 기념하고자 이천시가 지어준 관내 'B미술관'을 지목했다. 

 

이어 “ 본 사업회는 이천의 독립투사들의 행적을 발굴하고, 그 정신의 계승 선양을 목적으로 설립된 단체며, 이천의 친일청산 과제 또한 당연히 우리의 몫”이라고 역설했다. 

 

또한, 최명용 독립투사의 친손자로 이천친일청산위원회 위원장으로있는 최상돈씨는 축사를 통해 현 이천시의 'B미술관' 운영 태도에 대해 강력 비판했다. '이천친일청산위원회'에서 이천시 측에 친일화가 A씨의 친일행적을 알리는 입간판을 세우고자 건의한 사실과 이에 대한 시측의 입장을 일부 공개했다. 

 

특히 이천시 관련부서에서 보내온 답변서에 ‘B미술관’은 설립 당시 “이천시민들의 동의를 받았다”는 내용이 있다면서, “여러분 중에 동의해 주신 분 있냐”며 그 부적절성에 대해 강조 했다.

 

 안송란 광복회이천시지회 회장의 만세삼창으로 모든 행사를 마친 기념비 설립식에서는 장호원 초등학교 학생들이 맡은 역할로, 학생들의 대표로 나선 강병민(6년) 학생회장과 정다은(5년) 부회장의 소감발표와 정세희(5년) 부회장, 이수진(5년) 부회장의 헌화가 있었으며, 모든 참석자들로부터 기립박수를 이끌어냈다. 


 

 

 

 

 

 [기념비 뒷면에 새겨진 글]

 

 

독수리소년단 독립운동

 

일제의 한국지배가 기승을 부리던 1939년 이천 장호원제일심상소학교(현 장호원초등학교 전신) 학생들이 항일독립운동단체인 「독수리소년단(荒鷲少年團)」을 결성하였다. 단원들은 단장 박영순(당시 17세)을 위시하여 김순철, 이상진, 조태옥, 박기순(이상 15세), 박기하, 백운호, 오기환, 박승연(이상 14세), 곽태현(13세), 이상한, 이범상, 박정순(이상 12세), 김만식(11세) 등 어린 학생들이었다. 이들은 장차 독립군이 되고자 하는 목표를 세워 단장과 조장을 두는 등 단체를 조직화했고, 매주 1~2회씩 박영순 단장 집에 모여 조선 역사와 위인 이야기를 학습하며 반일 감정과 민족의식을 키웠다. 야밤에는 공동묘지에서 병정놀이를 빙자한 담력 훈련 겸 체력단련을 했으며, 조직의 운영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밭을 개간하고 채소를 직접 경작하기도 하였다.

 

 단체 결성 3년째인 1942년 2월 하순 무렵, 장호원읍 시내의 전봇대와 시내버스 창틀에 “일본은 패망하니 조선 민족은 그들에게 협조하지 말 것”과 “조선 민족 단결로 자주독립을 이루자”는 내용의 벽보를 붙였으며, 이 유인물을 전국 각지의 현직 군수들에게 우송하였다. 버스에 붙인 항일격문은 장호원 지역을 벗어나 서울 등 대도시로 퍼져나갔다.

 

 하지만 같은 마을 이○○ 밀고로 1942년 3월 초 단원 14명이 전원 체포되었다. 그들은 장호원주재소를 거쳐 이천경찰서로 이송되었다. 갖가지의 모진 고문을 당하고 어린 단원들은 사흘 만에 풀려났으나 주범으로 간주된 단원들은 더욱 긴 기간 동안 취조를 받았고 각각 형사처분을 받았다. 단장인 박영순은 경성지검으로 이송되어 형을 선고받고 긴 세월 옥살이를 했다. 박승연 박기순 이상진 곽태현 등은 혹독한 고문 후유증으로 세상을 일찍 등지게 되었다.

   

 10대 어린 소년들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이 사건은 높히 평가되어야 마땅할 것이나, 해방 후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이들의 애국행위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채 잊혀져갔다. 이에 이천의 독립운동 행적을 밝히고 독립투사들의 정신 선양을 목적으로 결성된 「이천독립운동기념사업회」에서는 수년간 <독수리소년단>의 정신을 기리고자 노력해 왔으며, 그 결실로써 이 기념비를 세우게 되었다.

              

 * 참조 : 백운호독립투사 증언 및 기타관련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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